< Hello, Friends > solo exhibition 

- 이재호 x 어린이 교육체험전 : 헬로, 프렌즈
- 2021. 5. 4 ~ 6. 15 / 구미문화예술회관, 구미
Hellow, Friends
이지혜, 구미문화예술회관 전시기획자

A. 이재호 ≒ 몬스터

몬스터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 위로 이재호 작가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석고데생에서 '아그리파 (Agrippa)' 조각상을 그려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 같은 조각상을 그리더라도 자신의 얼굴과 비슷하게 그린다는 것이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작가의 경험으로 빚어진 존재들이라 더욱 그러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그렇기에 그의 몬스터를 살펴보면 얼추 그를 알 수 있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가 소속된 대학은 아카데믹한 작업 방식을 추구하던 곳이었고, 그것에 실증을 느낀 이후 '내 작업', '내 것'을 찾기 위해 여러 작업을 끄적였다. 누군가 '괴물도감'이라 일컬은 초기 작업들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프로세스처럼 보인다. 2011년부터 시작된! 몬스터 시리즈는 여러 변천과정을 통해 현재의 몬스터로 탄생하였다.

몬스터는 작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에서 출발 한다. 작가노트를 인용하면 몬스터는 “사회 속에서 다르다고 인식되어 격리되고 외면받는 사람들을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유년시절 소극적인 성격 탓에 늘 혼자 외로움을 견뎠던 시간, 청년미술인으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여러 문제의 '결여'가 몬스터에 담겨있다. 그렇다고 해서 결여의 감정들이 비단 어둠의 감정들로 표현된 것은 아니다.

그 일례가 2013년에 제작된 다리가 6개인 고양이 < 호야호야 >에서 잘 나타난다. 작가는 우연히 2개의 다리로 태연히 앉아 있는 고양이 사진을 접하게 된다. 이때 작가는 고양이를 통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숨기거나 불편해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곤 그 고양이에게 특별함을 부여하고자 6개의 다리를 가진 고양이 인형을 제작했고, 작가의 어릴 적 애칭 '호야라고 이름 지었다(경상도에선 친근한 사람에게 이름의 끝 글자를 애칭으로 부르곤 한다). 작가는 늘 혼자였던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불안들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적극 활용 했다.

이러한 내적 성찰과 자각으로 탄생한 몬스터는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왜 몬스터였을까? 내가 처음 이재호를 만났을 때의 첫 이미지는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전시 준비과정에서의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로 인해 점점 사라졌는데, 그때 “저 사람 안에 잠재된 몬스터가 있으니 몬스터를 그릴 수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2011년 그는 관심 있는 것들을 드로잉하기 시작했고, 어린 시절 갖고 놀던 장난감, 만화, 지브리 영화 등이 작업의 소재가 되었다.

전시장 가장 안쪽으로 들어서면 높이 4.5m, 폭 6.8m의 거대한 벽의 몬스터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 이웃집 토토로 >의 신비로운 숲의 정령 토토로를 떠오르게 한다. 무언가 신비로운 잠재력을 가진 생명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내가 작가에게 느꼈던 감정이 투영된 것일 수도 있다). 애니메이션과 연계하여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몬스터의 존재가 더욱 환상적으로 보인다.

자, 이제 이번 전시를 살펴보자. 전시장에는 46 마리의 몬스터가 살고 있다. 몬스터들에게 점령당한 전시장은 그들의 서식지가 되었다. 호랑인가? 사자 인가? 고양이 같기도 하고? 새롭지만 새롭지 않은, 새롭지만 낯설지 않은, 여러 가지 동물 형상이 뒤섞인 '몬스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하나뿐인 특별한 존재이다. 또한 그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들이다. 늘 결에 존재했지만, 자세히 살피지 않고, 관심 가지지 않아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만들어내는 몬스터는 소회와 외면의 상징물 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눈빛과 태도에서 타인 으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경계 태세를 갖추는 동시에 상대방을 신기한 듯 뚫어지게 응시한다. 이 친구들을 통해서 '타인과 나', '나는 어떤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인가라는 관계에 관한 고민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특히 2021년도 신작 < 버블 몬스터 bubble monster >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거품과 나무, 꽃잎 등에 몸을 숨겼다. 껍질만 바뀌었을 뿐인데 마음가짐이 달라진 것일까? 본래의 방어기제로 가득 찬 날카로운 눈빛은 온데간데없다. 이는 때때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숨긴 채 누군가가 원하는 대로 겉모습과 태도를 바꾸는 거짓 행동의 은유이다. 본래의 나의 모습도 누군가에게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인데,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욕심 때문일까. 타인의 내면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다름을 인정하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B, 벽면페인팅

이재호는 전시마다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매번 전시공간에 맞추어 커다란 벽 위를 몬스터들로 가득 채운다. 작가가 조물주가 되어 물감과 붓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상처받은 몬스터들에게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인 셈이다. 전시장 벽면에 직접 작업을 하기에 전시가 종료되면 작품은 다른 페인트에 덮혀 사라지는 게릴라 방식이다.

그는 왜 벽면에 직접 페인팅을 하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 관한 질문 몇 가지는 “벽에다 그림을 그린 다고?" “열심히 한 작업을 다시 페인트로 덮어야 한다니 아깝다!"였다. 이는 단순히 표현방식의 가벼움 이나 치밀한 심미적 구성의 결핍 같은 표층적 문제가 아닌 미술작품이라 함은 응당 소장이 가능한 영구적 작품을 떠올리기 마련일 테니 이런 질문이 나올 법하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벽면페인팅의 의미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첫째, 동적인 것, 살아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즉 실존성의 강조인 것이다. 그의 몬스터는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가상의 세계에서는 우리와 같이 호흡하는 살아있는존재이니까.
둘째, 화이트 큐브(white cube)라 불리는 정적인 전시실에 직접 페인팅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제도권 에 반기를 던지는 반항적 태도이다. 이는 길거리에 마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로 제작된 일명 '길거리 낙서'인 그래피티(Graffiti) 방식과 닮아있다.
작가의 “하얀 전시장 벽에 직접 페인팅하는 걸 누구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라는 말에, 생각 해보니 너무나 멋진 일이었다. 전시장 벽면이 완전히 교체되지 않는 한 그의 작업은 10년이고 20년이고 새로운 페인트 층 밑에 숨어 영원히 살아있을 것 이니까. 결코 장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게릴라 작업이 아닌, 영원히 이 공간과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이 존재들에 더욱 애착이 갔다.
그런데 이재호의 벽면페인팅은 작품을 수집, 보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장품, 즉 미술품 매매와 거리가 멀다. 여기서 예술의 가치는 어떻게 매겨질 것인가? 실제로 작가는 “벽화로 치면 000만원짜리 작업 이에요."라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벽화처럼 적어도 및 년간 유지될 것도 아니고, 37일 후 전시가 끝나면 페인트로 뒤덮혀질 것인데 벽화와 같은 금액으로 산정이 가능할)가? 노동행위에 따른 가격 산정일까?

그리고 단순한 벽화 작업과 이 작업을 같은 가격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그리고는 이재호의 벽면페인팅의 구매방식을 고민 해보았다. 사라져버릴 퍼포먼스나 대지미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미술(아이디어)은 어떻게 거래될)가. 완벽한 무(無)형의 거래 사례는 티노 세갈(Tino Sehgal)의 < 키스 kiss >일 것이다. 퍼포먼스로 이루어지는 그의 작업은 사진, 영상, 문서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되지 않으며, 관객과 미술관 측에도 진행과정을 촬영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퍼포먼스 매매 방식도 매우 특이하다. 증명서류를 대신할 미술관 관계자, 변호사 등이 공증인으로 참여하여 면대면 구두로 계약을 진행한다. 이때 구매자는 이 퍼포먼스를 재현할 '권한을 얻는다.
이처럼 작가의 아이디어, 사라져버릴 퍼포먼스와 대지미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미술도 모두가 미술 시장에서 거래된다. 그리고 이렇게 '소유할 수 없는' 미술을 소유하는 값은 그 작품의 역사적 가치, 작가의 명성, 화제성을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일종의 작가 후원인 셈이다. 따라서 이재호 작업의 거래 방식은 단발성 벽면페인팅을 위해 그를 초청하여 예술성과 노동력의 대가를 지불하는 방법이 된다.